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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훈민정책과 훈민정음이란 무엇인가?

  • 한글세계화운동연합
  • 2018-04-03 22: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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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표기 수단이 없는 백성들에게 이를 마련해 주기 위해 15세기 중세 국어를 토대로 하여 국어의 문자화(文字化)에 성공하고, 이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교화 사업(敎化事業)을 실시한 것을 훈민정음에 의한 훈민 정책이라고 한다.

 

실지로 애민 사상이 남달리 강했던 세종은 조선 건국 초부터 표방해 온 왕도정치사상(王道政治思想)·천도사상(天道思想)·예치주의사상(禮治主義思想)·법치사상(法治思想) 등을 바탕으로 하여, 유교 국가로서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도 이러한 정신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훈민정음은 대개 이러한 목적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된 이래, 새 글자의 음가와 사용법을 설명한 한문책 ≪훈민정음≫(1446년 간)과 ≪훈민정음국역본≫(1447)에 이용된 것을 비롯, 경서·불서(佛書)의 번역, ≪동국정운≫과 같은 운서 편찬, ≪농사직설 農事直說≫·≪간이벽온방 簡易辟瘟方≫과 같은 실용 위주의 책, ≪유합 類合≫과 같은 한자 교과서, ≪내훈 內訓≫ 같은 교화서(敎化書), <용비어천가>와 같은 문학 작품 표기에 이용되었다.

 

분야별·시대별로 개관해 보면, 훈민정음은 창제된 뒤 조선 건국을 찬양하기 위해 편찬된 ≪용비어천가≫(1447년 간) 안의 국문 가사를 표기하는 데 가장 먼저 쓰였고,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를 내용에 따라 분류하여 번역한 ≪분류두공부시언해 分類杜工部詩諺解≫(1481년 간) 표기에 쓰였다.

 

훈민정음 창제 사업과 함께 ≪동국정운≫(1447년 간)을 편찬하고, 새로 바로잡은 우리 나라 한자음(漢字音)을 보이기 위하여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것도 백성을 위한 하나의 교화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표준 중국 본토자음(本土字音)을 나타내기 위해 편찬된 ≪홍무정운역훈≫(1455년 간)의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것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15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는 ≪유합≫과, 1527년(중종 22) 최세진이 편찬한 ≪훈몽자회≫, 그리고 이보다 앞서부터 널리 사용되어 온 ≪천자문 千字文≫과 같은 아동용 한자 입문서에서도 훈민정음으로 석(釋: 새김)과 음(音)을 표기하여 학습 효과를 거두도록 했는데, 이러한 예가 훈민정음이 교화 사업에 쓰인 가장 좋은 본보기에 속한다.

 

아동용 계몽 서적 이외에 훈민정음 창제 직후부터 한문으로 쓴 교화 서적을 번역하여 백성들이 쉽게 읽도록 하려는 계획도 추진되었다.

 

세종의 명에 따라 1434년에 편찬, 간행된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가 세종 때부터 성종 때(1481년경)에 걸쳐 번역, 간행되었고, 부녀 훈육에 필요한 대목을 ≪소학 小學≫ 등 4책에서 뽑아 편찬한 ≪내훈≫도 1475년 번역문과 함께 간행되었다.

 

교화 서적으로는 본받을 만한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행실을 담은 내용을 모아 1518년 편찬, 번역한 ≪이륜행실도 二倫行實圖≫가 있으며, ≪삼강행실도≫의 속편인 ≪속삼강행실도 續三綱行實圖≫도 1514년에 편찬, 번역, 간행되었다.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지침서로 ≪주자증손여씨향약 朱子增損呂氏鄕約≫(1518년 간)과 ≪정속언해 正俗諺解≫(1518년 간), ≪경민편 警民編≫(1519년 간) 등이 번역, 간행되었다.

 

훈민정음은 의서와 농서(農書) 등 일반 대중의 실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분야에 있어서도 훈민용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의서 분야로는 ≪구급방언해 救急方諺解≫(1466년 간), 어디서나 구급용으로 쓸 수 있도록 편찬, 번역된 ≪구급간이방 救急簡易方≫(1489년 간)을 비롯, ≪촌가구급방 村家救急方≫(1538년 간), ≪간이벽온방≫(1525년 간), ≪우마양저염역치료방 牛馬羊猪染疫治療方≫(1541년 간), ≪분문온역이해방 分門瘟疫易解方≫(1542년 간) 등이 있고, 농업 분야 서적으로는 강희맹(姜希孟)이 편찬한 ≪금양잡록 衿陽雜錄≫(1492년경 간)과, 세종 때 한문으로 편찬하고 후대에 번역한 ≪농사직설≫ 등이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조선에서는 유교 국가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유교 경전의 번역에도 힘을 기울여, 이를 널리 읽히려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때부터 사서오경의 번역이 추진되어, 먼저 구결(口訣)을 훈민정음으로 기록한 다음 16세기 후반 선조 때에 이르러 그 번역이 완성되었다.

 

경서의 번역(언해) 사업은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계속되어 유교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이상에서 열거한 경서·의서·농서·계몽서 이외에도 사회 교화를 위한 서적의 간행이 많이 늘어났는데, 이러한 서적들은 대개 교훈을 위주로 한 내용이 많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광해군 때에 이르러 효자·열녀·충신의 행실을 본보기로 보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1617년 간)가 간행되었으며, 인조 초에는 ≪오륜가언해 五倫歌諺解≫, 숙종 때에는 중종 때 박세무(朴世茂)가 지은 ≪동몽선습 童蒙先習≫이 번역, 간행되었다.

 

영조 때에는 ≪삼강행실도≫·≪이륜행실도≫·≪경민편언해≫·≪내훈≫ 등이 중간되는 동시에 ≪어제여사서언해 御製女四書諺解≫(1736년 간)·≪어제상훈언해 御製常訓諺解≫(1745년 간) 등이 간행되어 사회적인 귀감을 보였다.

 

영조 이후 두드러진 특징은 왕이 직접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으로 된 문장을 통해 교훈을 내린 윤음(綸音, 원문은 한문)이 많이 간행된 것이다. 영조 때부터 ≪어제계주윤음 御製戒酒綸音≫(1757년 간)·≪유중외대소신서윤음 諭中外大小臣庶綸音≫(1782년 간)·≪유호남육읍인민윤음 諭湖南六邑人民綸音≫(1794년 간) 등 수많은 윤음이 간행되었는데, 이러한 윤음 가운데에는 천주교에 빠지지 말라고 경계한 ≪척사윤음 斥邪綸音≫(1839년 간), 임오군란 뒤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내린 ≪유팔도사군기로인민등윤음 諭八道四郡耆老人民等綸音≫(1882년 간) 같은 것도 있었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으나 훈민정음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훈민정음은 창제되자마자 불경 번역에 이용되었는데, 이는 어려운 불경(한문)을 쉽게 번역하고 알기 쉬운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여 일반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1447년에는 벌써 방대한 분량으로 간행된 ≪석보상절 釋譜詳節≫의 표기에 훈민정음이 이용되었고, 같은 해 간행된 ≪월인천강지곡≫에서는 석가의 공덕을 칭송한 노래 500여 곡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였다.

 

세조 때에 이르러 1461년(세조 7) 간경도감(刊經都監)이 설치되어 대대적으로 불경의 번역 간행 사업이 진행됨으로써 상당한 분량의 15세기 중세 국어 산문(散文)이 훈민정음으로 표기되었다.

 

간경도감에서는 ≪능엄경언해 愣嚴經諺解≫(1462년 간)·≪법화경언해 法華經諺解≫(1463년 간) 등 10여 종의 불경을 번역, 간행하였고, 그 뒤로도 역대 왕 또는 왕비 등에 의해 불경이 여럿 간행되었으며 조선 후기까지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이 밖에 훈민정음은 ≪오대진언 五大眞言≫(1485년 간)과 같은 범어(梵語:산스크리트)로 된 불경의 음을 표기하는 데에도 쓰였다.

 

이상으로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역대 왕들이 백성을 가르침에 있어 훈민정음을 얼마나 사용해 왔는가를 간략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기까지도 조선의 공용어 및 공용 문자는 어디까지나 한문과 한자였다.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공용 문자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1894년 11월 21일 조선 정부 칙령 제1호로 “법률 명령은 다 국문으로 본(本)을 삼고, 한역(漢譯)을 부하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뒤부터의 일이다.

 

물론, 이 법령이 바로 널리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나, 이 무렵에 이미 훈민정음만으로 신문·문학작품·종교서적 등이 간행되기도 했으므로 백성들을 깨우치는 데 훈민정음이 더욱 큰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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