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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한글, 광복 후에는 이렇게 사용되었다.

  • 한글세계화운동연합
  • 2018-04-03 22: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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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광복은 어문 생활에도 새로운 광명을 가져다 주었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이극로(李克魯)·최현배·이희승(李熙昇)·정인승(鄭寅承)이 광복과 더불어 석방되고, 학회는 이들을 맞이하여 열흘 만인 8월 25일 재건되었다. 당시 최대의 과제는 시급한 국어 회복이었다.

 

학회는 즉시 국어 교과서의 편찬, 국어 강습과 국어 교원 양성, ≪한글≫지의 속간과 중단된 국어사전의 편찬 등 당면 방침을 정하고, 정부 차원의 국어 정책과 민간 차원의 국어 운동을 동시에 짊어지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8년간의 암흑기를 겪고 난 당시의 상황은 암담하였다. 국어 교육을 받지 못한 청소년층은 문맹이었고, 안다는 층도 국어 규범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어 교원은 없었고, ≪한글첫걸음≫(1945. 11.)은 한때 국민학교와 중학교의 같은 교재였으니, 당시의 실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학회는 단일 지도 체제 아래 이 난국을 타개해갔다.

 

조선어학회는 1945년 9월 미군정이 시작된 뒤에도 여전한 권위를 가지고 계속 활동하였다. 군정하의 공용어는 일본어 대신 영어로 바뀌었으나, 정부 차원에서도 국어 순화는 긴급한 시책으로 행해졌다.

1946년 왜색일소를 위한 학술용어 제정, 1948년 같은 목적의 ‘우리말 도로찾기’가 그것이었다. 다만, 1945년 12월 미군정청에서 결정한 교과서의 한자 폐지는 1947년 논쟁을 겪으면서 결국 한자 병기를 취하였다.

 

국어 규범은 일제하에 작성된 조선어학회의 규정이 교과서에 채택됨으로써 시행되었으나, 1년여가 지난 1947년 난삽하다는 일선 교단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는 음소표기 대 형태표기의 여섯 번째 대결이었으나 역시 학회의 권위로 진정되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학회의 ≪큰사전≫인데, 수정 과정이 지연되어 국어 규범 집성을 갈구하는 모두에게 큰 불편을 안겨 주었다. 1947년에 1권이 나오고, 10년 만인 1957년에야 6권으로 완간되었으니, 국어 규범의 혼란은 그만큼 지속된 셈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국어 정책은 그대로 계승되어 큰 변동은 없었으나, 국어 규범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1946년 일부 사이시옷과 띄어쓰기를 수정한 <맞춤법통일안>과 ≪표준말 모음≫은 학회 자체의 사전에서 또는 문교부 교과서에서 임의로 계속 바뀌었고, 외래어 표기는 문교부에서 1948년 아예 새로 제정함으로써 일제하에서 이룩된 3대 사업은 크게 변질되었다. 게다가 단일한 규범이 서기 전에 1950년 6·25가 일어나, 이번에는 모든 복구가 다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3년 만에 부산에서 환도한 정부는 계속된 대통령의 유시에 따라 1954년 3월 한글 간소화와 국문 전용을 정책으로 결정하였다. 간소화가 강행되자 이에 대한 반대가 심하여 한글 파동으로 번졌다.

 

음소표기 대 형태표기의 일곱 번째 대립으로서 가장 치열한 것이었으나, 반 년 만에 대통령의 후퇴로 종식되었다. 그리고 국문 전용은 공문과 간판에 그쳐, 1951년 9월에 제정한 상용 한자를 근거로 하여 국한자 혼용의 2원제가 여전히 지속되었다.

 

국어를 되찾아 교육한 지 10년이 지난 1956년에는 일선에서 진실한 반성의 소리가 비등하기 시작하였다. 치열해진 입학 시험과 관련하여 국어 규범과 학교 문법의 통일을 강력히 요구한 것이다.

 

근본 대책은 세우지 못하고, 시행 불가능한 1948년 문교부의 <외래어표기법>을 1958년 <로마자의 한글화표기법>과 1959년 <한글의 로마자표기법>으로 개정하는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외래어의 원음주의가 여전히 지속되어, 이 역시 교과서는 교과서대로, 신문은 신문대로 통일을 기하지 못하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은 1961년 5·16 이후에 나타났다. 1962∼1963년 문교부 한글전용특별심의회의 한자어 추방 정책, 1963년 문교부의 <학교문법통일안> 공포, 1970년 교과서의 한글 전용 단행 등 계속된 일련의 정책이 그것이나, 모두 현실과 유리된 방안으로 거듭해서 실패로 돌아갔다.

 

한자어 추방은 일반에게 백안시되었고, 학교 문법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며, 한글 전용은 2년 만인 1972년에 종전대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1968년의 대통령 지시에 따른 1970년의 한글전용촉진책에 담긴 알기 쉬운 표기 방법과 보급 방법은 1969년 상반기 시한을 넘기고 1973년 6월에야 성안되었다.

 

<맞춤법통일안> 실시 30년 만에 규정과 실태 사이의 괴리 현상을 현실화하여 역사상 최초로 국정화하는 작업이었으나, 사세의 변화가 겹쳐 1979년에 겨우 연구용으로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준히읗과 사이시옷의 폐기와 같은 이미 사문화된 규정의 폐기, 원형 표기와 띄어쓰기의 축소와 같은 엇갈리는 문제의 규정화 등으로 집약된다. 특히, 밝혀 적기로 되어 있는 준히읗은 가령 규정대로 ‘적당ㅎ지 않다’로 쓰지 않고 거의 ‘적당치 않다’로 쓰고 있으며, 또한 한자어의 사이시옷도 ‘냇과의원’등으로 쓰지 않고 ‘내과의원’등으로 쓰고 있는 실정이다.

 

사문화된 규정의 폐기는 불가피한 일이다. 표음화의 경향인 그 어원 표시의 완화는 확실히 현실 타협의 방법이나, 국어 규범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좀더 일찍 서둘러야 했을 것들이다.

 

한자 문제를 신문에서는 각기 제한 한자를 사용하는 방침을 취하고, 교육에서는 한글 전용의 모순과 여론에 부닥쳐 1971년 12월에 다시 한문 교육을 시행하게 되어, 기초 한자 1,800자를 제정하여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는 1970년의 한글전용정책을 번복하여 종전으로 환원했음을 뜻하므로, 국한자 혼용과의 2원제가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신문의 한자 사용은 점차 줄어드는 경향이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1975년 신문 정치면의 한글 표기가 1974년에 비해 10% 이상 늘었다고 하며, 한 통계는 또 신문 기사 전체의 한자 사용률이 1950년대 46.16%, 1960년대 28.29%, 1970년대 20.12%,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8.21%로 크게 줄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12% 이상 줄어든 것은 한글 세대의 등장과 유관하다는 해석이다.

 

잡지나 단행본 등 출판물에서도 거의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이며, 한 나라의 언어 정책과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국어 순화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가 개선되지 못하였다. 1962년 한글전용특별심의회 방안이 실패한 뒤, 1963년 문법 파동을 빚은 문교부의 <학교문법통일안>에서도 명사식 용어가 채택되었다. 1949년 이후 교과서에 적용되던 292개의 순수한 우리말과 한자음으로 된 말과의 두 갈래 용어가 18년 만에 통일되었다.

 

순수한 우리말이라는 표현은 허울 좋은 명목일 뿐, 실상은 ‘씨갈(품사론)·월갈(문장론)·함께자리(공동격)·안박인꼴(부정형)’ 등과 같이 부자연한 인조어이므로 폐기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논란에서 나타난 거부 반응을 통하여 국어 순화는 일반화된 한자어까지도 추방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1960년대의 이 귀결은 일제하의 국수주의적 운동과 다른, 그 성격과 방향이 잡힌 사실로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한 정부는 다시 1976년부터 문교부에 국어순화운동협의회를 두어 각 부처에서 의뢰한 용어를 심의, ≪국어순화자료≫를 책자로 계속 출판하고 있다.

 

한편, 1980년대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에 대비, 1982년 정부의 국어 및 외래어 표기 통일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우선, 1959년 2월 개정한 문교부 <한글의 로마자표기법>을 1983년 12월에 <국어의 로마자표기법>으로 개정하여, 종전의 내국인 위주의 형태주의에서 매큔라이샤워 표기체계와 같은 외국인 위주의 표음주의로 전환하였다. 한 나라에서 문교부는 형태표기를, 건설부는 매큔라이샤워 표기에 의한 표음표기를 취하던 모순이 이로써 해소되었다.

 

1958년 10월 개정한 문교부의 <로마자의 한글화표기법>을 1985년 12월 <외래어표기법>으로 개정하여 미진하나마 현실음에 접근시키는 방향으로 바꾸었다. 이들은 각각 이론이나 이상보다도 현실과 편리의 존중을 지향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으며, 어문 생활의 실제와 공식적인 규정 사이의 괴리 현상을 훨씬 좁히게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1984년 공포된 문교부의 <국어의 로마자표기법>은 ‘˘’(반달표)와 ’(어깻점) 등 특수부호를 사용함으로써 컴퓨터에서 입력과 검색이 불편하여 다시 개정에 이르게 되었다. 2000년 7월 문화관광부 고시 제2000-8호로 제정된 <국어의 로마자표기법>은 정부에서 고시한 네 번째 표기법이다. 이 표기 체계는 국어의 발음에 따라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특수 부호는 사용하지 않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특수 분야에서 한글 복원을 전제로 표기할 경우에 대비하여 전자법안을 따로 마련하였다.

 

<한글맞춤법>은 1933년 공표 이후 부분적 수정을 거쳤으나, 1950년대 후반에 점차 자리를 잡으면서 사문화되거나 사정을 기다리는 사항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지지 않아 거의 그대로 사회적으로 수용됨으로써 사전 및 교과서에까지 반영되었다.

 

그 동안 표준어 사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79년 문교부에서는 <표준말재사정시안> 및 <한글맞춤법개정시안>·<외래어표기법개정시안> 등을 마련했다가 1981년 학술원으로 이 작업이 이관되었고, 1985년 국어연구소(1990년 국립국어연구원으로 격상됨)가 발족하면서 다시 이 연구소로 이관되어 문교부 국어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1988년 1월 <표준어규정>과 함께 <한글맞춤법>이 문교부 고시 제88-1호로 관보 제10837호에 고시되었으며, 1989년 3월 1일부터는 이 새로운 맞춤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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