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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한글, 일제강점기 때는 이렇게 수난 당했다

  • 한글세계화운동연합
  • 2018-04-03 22: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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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은 일제의 일방적인 강압에 의해 멸망하고 그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 강점기는 단순한 강점이 아니라, 민족을 근본적으로 말살하려는 흉계를 가지고 철저한 동화정책이 끈질기게 시행된 시기였던만큼, 우리 국어의 수호와 발전은 심각한 위기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흉계도 단계적으로 이루어져, 그 식민 정책은 대개 전기인 무단정치시대와 중기인 문화정치시대와 후기인 강력정치시대의 3기로 구분된다.

 

8대 35년에 걸친 총독정치를 통해 종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은 국권의 상실과 함께 대한제국의 국어가 민족어로 전락하고, 외국어였던 일본어가 대신 국어로 등장한 것이었다.

 

일본은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에서 성급하게 국민 정신의 함양과 일본어 보급을 교육의 목적으로 내세웠다. 그 언어 정책은 출발부터 1국 1국어의 원칙을 악용하여 일본어 교육을 통한 국민 정신의 함양, 즉 노골적인 민족말살 동화예속 정책을 감행하려는 것이었다.

 

식민 정부는 취조국(取調局)에서 해오던 우리 민족 문화의 조사와 함께 1911년 4월 ≪조선어사전≫ 편찬에 착수했고, 내무부 학무국에서는 1912년 4월 통일을 목적으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저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최초로 실시된 국어정서법이었다.

 

이 철자법은 국문연구소에서 이미 작성한 <국문연구의정안>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따로 실태를 대상으로 성문화한 표음주의 철자법이었으며, 그 뒤 교과서에 채택되어 약 10년간 국어 규범의 기준이 되었다. 당시 형식적으로나마 조선어 교육을 병행했으니, 일본어 위주의 이중 언어 정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간에서는 조선광문회의 ≪조선어자전≫(말모이)을 비롯한 사전편찬, 김희상(金熙祥)의 ≪조선어전≫을 비롯한 문법서의 저술, 주시경을 중심한 조선어강습원의 국어 강습 등 국어 운동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국어 연구 내지 운동은 그 시대 상황으로 보아 이념적인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일제의 무자비한 무단정치는 이윽고 민족적 민중 항거에 부딪쳐 난관에 빠졌다. 독립을 선언한 1919년 3·1운동은 일제의 강점에 항거한 일대 민중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곤경에 빠진 일제는 부득이 유화정책을 내세워 약 18년간의 문화정치를 시작하였다. 민간 신문의 허가, 관습의 존중과 차별 대우의 철폐, 교육제도의 개선과 조선어 장려 등 표면적인 유화정책이 시행되었다.

 

우선, 저들이 계획한 ≪조선어사전≫이 1920년 3월 출판되었고, 이에 따라 1921년 3월 <언문철자법>이 개정되었다. 이것은 표준어와 국어 규범의 재정비라는 의미가 있었다. 어문 생활에서는 3·1운동을 고비로 1920년대에 언문일치가 이루어졌고, 민간 신문의 보급, 잡지의 융성, 민간의 계몽 운동 등으로 문자 생활이 확산되어 갔다.

 

저들의 20년 시정 실적은 1930년 통계로 취학률 24%, 문맹률 78%였다. 표면적으로는 문화정책을 내걸었지만, 저들이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한 반항 투쟁은 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표면화되었다.

 

1920년대에는 미진한 국어 규범의 확립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미 1921년의 철자법 개정에서 어윤적·권덕규(權悳奎) 등 후주시경파에 의해 제기되었다가 보류된 표의주의 철자법이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후주시경파는 1921년 12월 학회를 결성하고 운동에 나섰다.

 

1930년 2월 개정한 저들의 <언문철자법>에서는 다수 후주시경파의 참여로 표의주의 철자법이 채택되었다. 음소표기 대 형태표기의 논쟁은 첫번째 1446년 ≪훈민정음해례≫, 두 번째 1909년 국문연구소 <국문연구의정안>, 세 번째 1921년 개정된 <언문철자법>, 네 번째 1930년의 개정 과정에서 일어난 철자 파동 등 거듭된 대결을 거쳐 비로소 형태 표기로 낙착된 것이다.

 

문제가 이로써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후주시경파의 조선어학회는 철저하지 못한 <언문철자법>에 대한 반대, 전통적 보수파를 대표하는 박승빈(朴勝彬) 중심의 조선어학연구회는 양자에 대한 반대로 치열한 논쟁이 재연되었던 것이다.

 

다섯 번째 논쟁인 이 대결은 1932년 11월 동아일보사 주최의 토론회,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 공표, 1934년 7월 재래식 정음파의 반대 성명에 이은 피차의 중상적 비방 등으로 이어지면서 불꽃을 튀겼다.

 

많은 학자를 포용한 한글파는 문화계의 호응을 받으면서 1936년 표준어사정, 1940년 <외래어표기법> 제정에 이어 1942년 ≪조선말큰사전≫ 출판에 착수하여 1921년의 개정 철자법을 주장하는 정음파보다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32년 창간한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1934년 창간한 조선어학연구회 기관지 ≪정음≫, 1931∼1934년 민간 신문의 브나로드 운동과 강습회 등은 일제강점하의 현저한 국어 운동으로서 일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30년대 전후의 논쟁 및 출판물의 융성은 식민 정부의 언어 정책을 초월한 국어 운동의 고조와 확산을 자아냈다. 이 운동이 독립 운동의 일환이었던만큼 일제는 이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군벌에 의하여 다시 강력정치를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허울 좋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살벌한 분위기의 민족 말살과 저들의 전쟁을 위한 총동원이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1938년 4월의 파멸적 교육령에 의한 조선어과 폐지에 이은 조선어 금지와 일본어 상용의 강요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성전완수(聖戰完遂)라는 미명하에 전국토를 병영화하고 더욱 무자비한 만행을 자행하였다. 특히 1942년 10월의 조선어학회 사건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1920년부터 용인해 왔던 학회 활동을 악랄한 <치안유지법>을 적용, 마구 엄단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징(韓澄)·이윤재(李允宰)가 감옥에서 숨지고, 출판 허가까지 받았던 사전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35년, 특히 그 후기 8년간은 문자 그대로 우리 민족사에서 전례가 없는 암흑기였다. 언어 정책이라고는 일본어의 강요뿐이고, 줄기차던 민간의 국어 운동은 뿌리째 뽑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본어 해득률은 저들의 통계로 1919년 1. 8%, 1930년 8. 3%에서 1938년 12. 3%, 1943년 22. 1%였고, 1945년에는 27%로 추정된다. 그 통치가 5년 더 연장되었다면 45%로, 10년 연장되었다면 85%로 상승되었을 것이 아닌가?

 

통계에 포함되어 있는 10세 미만 인구 34.2%를 제외하면, 1943년 22.1%는 33%, 1945년 27%는 역시 41%로 상승된다. 마찬가지로 45%는 68%로, 85%는 128%라는 초과 현상까지 나타날 것이다.

 

저들의 민족어 말살 정책은 1894년 이후 12년간의 일본어 부식기, 1906년 이후 30년간의 2어 병용기를 거쳐 1937년 일본어 전용기를 만들었다. 60년 기한으로 그 목표 달성을 꾀하였을 것이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며 8·15광복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1931년 이후 10년에 걸쳐 혁혁한 업적을 쌓은 조선어학회의 노력은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그 결정체인 ≪조선말큰사전≫은 완성되지 못한 채 소멸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 사전은 국어 규범을 세우기 위한 맞춤법·표준말·외래어표기 등을 장기간에 걸쳐 제정하고 이것을 기준으로 집대성한 최초의 국어 규범 사전이 될 것이었다.

 

국어 규범의 확립은 국어 근대화의 가장 긴급한 기초 작업인데, 이 중요한 문제가 완성될 찰나에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그래서 이미 매듭지은 일련의 국어 규범이 책자로나 존재할 뿐, 소멸 단계에 있는 국어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가장 암담한 시기가 되었다.

 

강인한 우리 민족은 그들의 계획대로 쉽사리 소멸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총칼 앞에서 겉으로는 복종했지만, 민족 의식을 지닌 집안에서는 개인적으로 한글과 한자를 가르쳤고, 일제 막바지인 1945년 7월에도 대한애국청년당이 부민관(府民館)에 투탄한 무력 투쟁이 있었다. 장하고 거룩한 민족 정기가 끈질기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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